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짐 라이스 (문단 편집) == 선수 생활 == 1971년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에 1라운드 15번으로 지명되어 입단한 후, 마이너리그를 씹어먹고 1974년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1974년 트리플A(AAA)에서 뛰면서 해당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것. 그 결과 1974년 확장 엔트리때 메이저리그 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75년 신인으로서 풀 타임으로 뛴 첫 시즌에 0.309 22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면서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내면서 맹활약, 그 해 신인왕 투표 2위와 MVP 투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이 해 [[보스턴 레드삭스]]는 짐 라이스와 그 해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는 [[프레드 린]], 그리고 명예의 전당 포수인 [[칼튼 피스크]]등의 대활약에 힘입어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기에 이른다. 하지만 정작 라이스는 PO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는데, 시즌 막판에 손목에 공을 맞고 부상을 당했기 때문. 선수 본인은 보호대도 풀고 뛰겠다고 우겼지만, 코치진의 만류로 인해 결국 PO 엔트리에 드는데 실패했고, 신예 강타자의 공백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스턴은 3승 4패, 단 한 끗 차이로 [[신시내티 레즈]]에게 지면서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한다. 라이스의 최전성기는 1978년이었다. 1978년 163경기 전 경기[* 이 해 보스턴 레드삭스는 10경기 넘는 승차를 따라잡혀 [[뉴욕 양키스]]와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루게 된다. 그래서 경기수가 163경기가 된 것. 그리고 원게임 플레이오프에서 패배]를 소화하며 0.315 46홈런 139타점이라는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며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에 올랐다. 1977년과 1978년, 1979년 3년 연속으로 총루타[* 단타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더한 수치.]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는데, 이 기록을 가진 선수는 딱 하나, 전설적인 타자 [[타이 콥]] 뿐이었다. 특히 1978년에는 총루타가 400을 넘는 역대급의 성적을 찍기도 했다. 그 뒤로도 우익수 [[드와이트 에반스]], 3루수 [[웨이드 보그스]] 등과 함께 80년대 레드삭스의 주축 야수로 뛰며 꾸준히 20홈런 이상, 100타점 가량은 기대할 수 있는 팀의 주포로서 맹활약했다. 1983년에는 다시 39홈런을 쳐내면서 통산 세 번째 홈런왕에 등극하기도 했고, 1986년에는 20홈런 110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을 다시금 월드시리즈에 올려 놓았다. [[1986 월드 시리즈]]에서 0.333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분전했지만, 역시 이 때도 보스턴은 [[뉴욕 메츠]]에게 3승 4패로 지면서 결국 라이스는 은퇴할 때까지 [[우승 반지]]와는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Jim+Rice.jpg]] 현역 시절 제법 유명한 장면은 위의 사진.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볼보이가 공에 맞아 다친 것을 급히 뛰어나가 아이를 안고 응급처지를 위해 달려가는 장면이다. 덕분에 아이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창 때도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말년에 특히 무릎을 다치면서 고생했다. 무릎 부상 때문에 기량이 저하되자, [[마이크 그린웰]] 등에 밀려 주전에서 종종 밀리곤 했다. 그런데 1989년 시즌 도중 자신의 타석에서 대타로 교체한 감독 [[조 모건(1930)|조 모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신시내티 레즈]]의 명 2루수 [[조 모건]]과는 다른 인물이다.]을 밀치는 대형 사고를 친다. 부상 때문에 예민해서 벌어진 일. 어쨌거나 부상 때문에 제대로 시즌을 소화하지 못했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까지 벌어지자 1989년 보스턴은 그를 방출했고, 라이스는 그대로 은퇴했다. 다소 이른 나이인 만 36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